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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7.29 [법정스님 말씀]모든 상에서 벗어나라

모든 상에서 벗어나라

내 가르침은 뗏목과 같은 것

법도 버려야 할 텐데 법 아닌 것이랴


여래를 몸의 형체로써는 볼 수 없다. 몸은 실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형체는 거짓이요 허망한 것, 형체가 없는 것은 거짓이 아니다. 그러므로 형체가 있고 없는 양면에서 여래를 보아야 한다. 

* 여래란 진리에 도달한 사람, 혹은 진리를 말하기 위해 온 사람이란 뜻. 그러나 여기서는 실상의 뜻이 더 강하다. 형체는 물체만이 아니라 생각의 자취까지를 말한다. 


여래란 어떤 모양을 갖춘 육신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일체지를 갖추어야만 여래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마음에 망상과 분별을 일으키면, 내니 남이니 중생이니 목숨이니 하는 데에 집착하게 된다. 법(진리 혹은 교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데에도 집착하지 말라. 내 가르침은 강을 건너는 뗏목과 같은 것. 법도 오히려 버려야 할 것인데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금강경>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자기가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존경받을 사람이 '나는 존경받을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존경받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데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받을 사람이라고 '말해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자기가 아라한이 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나'라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이다. 

<금강경>

* 아라한은 범어 아르한(arhan)에서 온 말인데 '공양받을 자격자', '성자'의 뜻. 금강경은 반야(지혜)의 공을 강조한 경전이므로, 생각의 자취나 이름을 철저히 배제한다. 생각의 자취와 이름이 실상을 왜곡하고 청정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자칭 깨달았다고 하거나 견성했노라고 자기 과시를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부처님의 이런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사람은 덜된 사이비임을 알 수 있다. 이삭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고, 열매가 익으면 저절로 향기를 발하는 법. 내 향기를 맡으라고 큰소리치는 열매를 우리는 아직 보지 못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는 불국토를 장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말이다. 불국토 장엄, 불국토 장엄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장엄이 아니다. 그저 불국토 장엄이라고 말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형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소리와 향기와 맛과 감촉과 생각의 대상에 집착하여 마음을 내서도 안 된다. 아무 데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한다. 

<금강경>

* 불교경전에 나오는 장엄이란 말은 덕으로써 장식함을 뜻한다. 실체와 이름을 혼동하지 말라는 뜻에서 이런 설법이 행해졌을 것이다.


모든 현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 생각하고, 바라밀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베풀 때에도 베푼다는 생각 없이 보시 바라밀을 행하라. 진정한 보시는 베푼 사람도 없고 베푼 물건도 없고 베품을 받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 

* 바라밀은 범어 파라미타(paramita)에서 음역된 말인데, 피안에 이르다, 혹은 완성의 뜻. 베푼 사람도 베푼 물건도 받는 사람도 없이 베푸는 것을 삼륜청정 또는 삼륜공적이라고 한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준다는 의식이 없이 나누어 가져야, 그 일에 거리낌이 없어서 자유로울 것이다. 


사물에 집착함이 없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라. 모든 법의 실체와 현상은 붙잡을 수 없고 얻을 수도 없다. 이렇다고도 저렇다고도 단정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 반야바라밀을 행하라. 밝은 지혜로써 번뇌를 없애버리고 불퇴전의 경지에 이르려거든 반야바라밀을 수행해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면 그릇된 소견에 빠지지 않고 생각의 번거로움을 돌이켜 평안하게 될 것이다.

<대품반야 습응품>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반야바라밀을 보지도 말고, 그 이름을 생각하지도 말며, 행하고 행하지 않는 차별을 두지 말라. 세상에서는 흔히 가설로 이름붙인 것을, 그 이름에 얽매여 망상 분별을 일으키고 말을 일으키고 집착을 일으킨다. 

<대품반야 습응품>


색(물질적인 존재)은 그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공은 곧 색이 될 수 있다. 원래 색의 자성은 공이다. 자성이 공에 의지하지 않고 우선(가설로) 그것을 색이라 이름붙인 것이다. 이런 경우 공은 색과는 다르다. 그러나 색은 공을 떠나 존재하지 않고, 공도 색을 떠나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일 수 있는 것이다. 

<대품반야 습응품>

* 이런 논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이 건성으로 읽으면 무엇을 말함인지 아리송할 것이다. 성급한 현대인들이 불교를 어렵다고 말하는 까닭도 바로 이런 점에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조급한 생각을 가라앉혀 차분히 음미해 보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거려질 것이다. 여기서 책을 현상으로, 공을 본질로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깨끗하고 더러운 차별을 두지만, 사물의 본성은 깨끗한 것도 더러운 것도 아니다. 집착하기 쉬운 마음이기 때문에 깨끗한 것을 가까이하고 더러운 것을 멀리하라는 것이다. 이 것은 방편일 따름. 집착하는 마음(편견)을 떠나서 보면 모든 존재는 다 깨끗하다.

<대품반야 탄정품>



지팡이 끌고 이슥한 길을 따라 

홀로 배회하며 봄을 즐긴다

돌아올 때 꽃향기 옷깃에 스며

나비가 너울너울 사람을 따라온다.

- 환성 <봄구경>

Posted by 파노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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