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상식 4]경전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불교말씀/불교상식 2012. 9. 29. 17:24 |부처님께서 입멸하시자 일부의 수행승들은 부처님의 간섭으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롭다. 더 이상 간섭받을 필요가 없다."
이 소리를 들은 마하가섭은 놀라서 부처님 장례를 치른 후 왕사성(찌금의 라즈기르) 외곽, 입구에 칠엽수 나무가 우거진 굴(칠엽굴) 속에서 수도승단의 대표들을 소집하여 경전편찬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때 500명의 수행승들이 모여 부처님의 말씀을 원형대로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하여 암송 형식으로 경전을 편찬하였습니다.
암송형식이란 일생 동안 부처님의 비서였던 아난다(아난) 존자가 먼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던 말씀을 선창하면 500명의 대표들이 제각기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한 후 수정, 보완을 거쳐 일제히 합창식으로 낭송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확인된 말씀들이 수행승단 전체의 이름으로 공표되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100년경(B.C 3세기)이 되자 계율에 대한 사소한 문제로 불교승단은 소장파와 노장파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노장층들은 젊은 소장파들로부터 자신들의 주장을 지키기 위하여 비야리성(지금의 바이샬리)에서 두번째 경전편찬회의를 열었습니다. 이때는 700명의 수도승들이 참여했습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200년경(B.C 2세기), 당시 인도의 왕이었던 아쇼카에 의해 파탈리뿌뜨라(지금의 파트나)에서 세번째 경천편찬회의가 열렸습니다. 목적은 해이해진 교단의 질서를 바로잡고 외국에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때 이 회의에 참석한 인원은 1,000명이었으며 9개월간에 걸쳐 경전편찬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B.C 1세기 중반이 되자 스리랑카에서 네번째로 대대적인 경전편찬회의가 열렸습니다. 첫번째, 두번째, 세번째 경전편찬회의는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승된 암송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네번째 회의에서는 종려나무 잎(패엽)에 싱할리 문자(스리랑카 문자)로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팔리어는 글자가 없는 인도 북부의 서민층 방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최초로 문자로 기록된 경전을 '패엽경'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종려나무 잎에 기록된 부처님말씀"이란 뜻입니다.
(석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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