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짝 개인 하늘을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누가 너를 묶어놓았느냐


지방장관인 배휴가 홍주 개원사라는 절에 가서 한 고승의 초상화를 보고 안내하던 그 절의 원주스님에게 물었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이 절에 살다가 돌아가신 큰스님입니다."

"얼굴은 그럴듯하군. 그럼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지요?"

원주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이 절에 선승은 안 계십니까?"

배휴가 묻는 말. 

그때 대중 가운데 황벽이란 스님이 선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스님을 소개해 주었다. 배휴는 조금 전 이야기를 들어 스님에게 물으려는 것을 스님은 아까처럼 다시 물어보라고 했다. 

"얼굴이 그럴듯한 이 큰스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이때 황백은 큰소리로, 

"배 정승!"

하고 불렀다. 배휴는 깜짝 놀라, 

"예?"

하고 대답. 황백이 다그쳐

"어디 있는고?"

하고 물었을 때 배휴는 단박에 그 뜻을 깨달았다.

<선문염송집> 


조주가 스승인 남전 화상에게 물었다. 

"도란 무엇입니까?"

"평상심이 도다."

"어떻게 하면 그 도에 계합할 수 있습니까?"

"네가 그 도에 계합하려고 하면, 오히려 도를 등지게 될 것이다."

"힘써 노력하지 않고 어떻게 도를 알 수 있습니까?"

"도는 알고 모르는 데 있지 않다. 안다 할지라도 그것은 망상이고,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답이 되지 않는다. 참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도에 이르게 되면 마치 하늘이 활짝 개인 것 같으리라. 그러니 일부러 이러니 저러니 따질 일이 아니리라."

조주 스님은 이 말끝에 깊은 뜻을 깨달아 마음이 밝은 달과 같았다. 

<조주록>

* 이런 문답을 선문답이라고 한다. 질문은 지성적으로 전개되지만 답은 체험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적인 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을 일으켜 최후의 답에 이를 수 없기 때문. 질문을 멈추어야 해답이 나오기 시작한다. 도는 구하려고 하면 얻지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으면 전혀 알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떤 스님이 석두 회천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선사는 대답했다. 

"누가 너를 묶어 놓았느냐?"


"어떤 것이 정토입니까?"

"누가 너를 더럽혔느냐?"


"어떤 것이 열반입니까?"

"누가 너에게 생사를 주었느냐?"

<전등록>

* 이와 같이 선문답은 상대가 설정한 전제조건을 거부하고 절대 무전제의 경지로 몰고 간다. 그것은 대개 일문 일답으로 그친다. 그 이상의 설명은 도리어 과잉친절이기 때문. 

선은 설명하거나 해설하는 등, 논리적인 전개를 거부한다. 그뿐 아니라 자기 안에서 나온 의문에 대한 해답은 자기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몰아세운다. 왜냐하면 답은 질문 속에 이미 잉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묻지 않고서는 해답을 꺼낼 수 없다. 

옛날 중국에 선에 흥미를 가진 한 벼슬아치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어떤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어떤 사람이 거위 한 마리를 항아리 속에 넣어 길렀답니다. 거위가 점점 자라서 항아리가 비좁게 되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항아리를 깨뜨리지 않고 그 거위를 무사히 꺼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선사는 큰소리로 그 벼슬아치의 이름을 불렀다. "네?"하고 그가 대답. "허, 이제 나왔군"하고 선사는 말했다. 항아리 속에 갇힌 거위뿐 아니라 그 벼슬아치까지도 꺼내준 것이다. 망상하지 말라!


낭주의 자사(지방장관) 이고가 약산 화상의 덕화를 멀리서 듣고 몇차례 뵙기를 청했으나 화상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어는 날 그는 몸소 산으로 찾아가 뵈려고 하니, 이때 화상은 경을 보면서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이고는 화가 나서 비꼬아 말했다. 

"막상 대면해 보니 천리 밖에서 듣던 소문만 못하군!"

이에 화상이 말했다. 

"상공은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고?"

이 말끝에 그는 사죄하고 나서 물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화상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가 다시 곁에 있는 물병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알겠는가?"

"모르겠습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느니라."

상공은 정중히 절을 하고 화상의 덕을 찬탄하였다. 


운문 화상이 법상에 올라가 말했다. 

"여러 스님들, 잘못 알지 말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요 속은 속이니라."


마곡산의 보철 화상이 하루는 부채를 부치고 있는데, 거기 한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성질은 변하지 않아 없는 데가 없거늘, 화상께서는 어째서 부채질을 하십니까?"

화상은 대답했다. 

"그대는 바람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줄만 알았지, 어디나 있는 줄은 아직 모르는구나."

그는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어디나 있는 도리입니까?"

화상은 말없이 부채질을 할 뿐이었다. 그 스님은 화상께 정중히 예배를 드렸다. 

<선문염송집>


달마 스님을 찾아간 혜가가 물었다. 

"스님,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하오니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시오."

달마 스님은 말했다. 

"그래? 어디 그럼 네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하게 해주마."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네 마음이겠느냐. 이제 너에게 마음을 편케 해주었노라. 알겠느냐?"

이 말끝에 혜까는 크게 깨달았다.

<조당집>

* 달마는 혜가에게 마음을 편하게 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지금 당장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이것이 진정한 선이요, 또한 선지식의 기능이다. 달마와 혜가의 이 안심문답은 그 후 선문답의 원형이 된다. 달마가 선불교의 시조가 된 것은 이 문답이 있었기 때문. 달마가 선불교의 시조가 된 것은 이 문답이 있었기 때문. 혜가가 달마의 제자로 된 것도 이 문답으로 인한 개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선의 생명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선문답은 그 후 점점 복잡하게 된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문답을 선문답이라고 할 만큼. 그러나 살아 있는 진짜 선문답은 순일 무잡하고 단순 명쾌하다. 그 어떤 허식이나 횡설수설도 용납이 되지 않는다. 그처럼 단순 소박하면서도 힘차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일상 대화를 가능하게 한 점에 달마의 진면목이 있다. 난해하고 곡선이 많은 문답에는 어딘가 속임수가 들어 있게 마련. 

도는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더럽히지 않음이 중요하다. 의식적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거나 무엇을 위해 한다면 이것은 벌써 더럽힘이다. 그래서 평상심이 도라고 한 것. 그럼, 어떤 것이 그대의 평상심인고?


그대들이 만약 미리 칠통(무명번뇌)을 철저히 깨뜨리지 않으면 섣달 그믐날(임종할 때)을 당해 정신차리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이 참선하는 것을 보고 '아직도 저러고 있나?'하고 비웃는다. 그러나 내 그런 사람에게 물으리라. 갑자기 죽음이 닥치면 그대는 어떻게 생사를 대적하겠는가?

평상시에 힘을 얻어놓아야 급할 때 다소 힘을 덜 수 있는 법이다. 목마르기를 기다려 샘을 파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라. 죽음이 박두하면 이미 손발을 쓸 수 없으니 앞길이 망망하여 어지럽게 갈팡질팡할 뿐이다. 평소에 구두선만 익혀 선을 말하고 도를 말하며,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면서 마치 공부를 다 마친 것처럼 행세하다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평소에 남들은 속일 수 있었지만 이때를 당해 어찌 자기 자신마저 속일 수 있을 것인가. 간절히 권하노니, 육신이 건강할 동안에 이 일을 분명하게 판단해 두라. 


참선할 때 의정과 함께 한곳에 매여 있기만 하면, 거치른 환경은 쫓지 않아도 저절로 물러가고, 번잡한 생각은 맑히려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맑아질 것이다. 

화두를 들 때에는 반드시 화두가 뚜렷하고 분명해야 한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와 같이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귀신굴'에 주저앉아 가물가물 졸면서 헛되이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오로지 어떻게 해야 저 쥐를 잡을까만을 생각한다. 곁에 닭이나 개가 있더라도 눈 한번 팔지 않는다. 

참선하는 사람도 이와 같아서, 분연히 이 일을 밝히고야 말겠다고 결단,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한 생각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딴 생각을 일으키면 쥐만 놓칠 뿐 아니라 고양이 새끼마저 잃게 될 것이다. 

* 화두를 공안이라고도 하는데, 공부의 안독에서 온 말. 그것은 정부의 법규 조문과 같아서 누구나 준수해야 할 절대성을 뜻한다. 즉, 부처님이나 조사가 열어보인 불법의 도리 그 자체를 뜻하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분별 망상을 털어버리고 참구해서 깨달아야 할 과제다. 

그 한 예를 들자면,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묻자 조주 스님은 "무(없다)"라고 대답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지니고 있다 했는데, 조주 스님은 어째서 없다고 했는지, 없다는 그 뜻을 참구해야 한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어떤 것이 내 본래 면목인고?' 이밖에도 1천 7백 공안이란 말이 있을 만큼 많다. 

화두는 반드시 눈 밝은 스승을 찾아가 직접 받아야 한다. 이를 결택이라고 한다. 화두는 밤이나 낮이나 가거나 오거나 앉으나 서나 생각생각 끊이지 않고 정신을 차려 참구해야 한다. 정진에 정진을 더하여 그 정진이 여물게 되면, 마음빛이 활짝 열리어 부처나 조사의 기틀을 깨달을 것이다. 이때 비로소 천하 노화상의 혀끝에 속지 않고 스스로 큰소리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한도인이요, 틀에서 벗어난 대장부요, 진정한 자유인이다.


바라건대 참되게 살려는 사람은 게으르지 말고 탐욕과 음욕에 집착하지 말며, 머리에 타는 듯한 불을 끄듯 하고 돌이켜 살필 줄을 알아야 한다. 덧없음이 산속하여 몸은 아침 이슬 같고 목숨은 저녁 노을과 같다. 오늘은 있을지라도 내일은 기약하기 어려우니 간절히 마음에 새겨둘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한번 사람 몸을 잃게 되면 만겁에 돌이키기 어려우니라. 

* 자, 이제는 남의 책은 덮어두고 자기 자신의 책을 읽을 차례다. 


사람마다 한 권의 경전이 있는데

그것은 종이나 활자로 된 게 아니다

평처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다. 

Posted by 파노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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